불가항력

Force Majeure

개념

지진이나 전쟁처럼 어느 쪽 잘못도 아닌 사유로 약속을 못 지켰을 때 그 책임을 묻지 않기로 미리 정해 두는 조항입니다.

등장 배경

계약은 원래 이유를 따지지 않는 약속입니다. 한 달에 99.9퍼센트 동안 서비스를 살려 두겠다고 적었으면 그 값을 못 지킨 순간 책임이 생기고, 왜 못 지켰는지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사정이 있었다는 설명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면 약속은 약속이 아니게 됩니다.

문제는 그 구조를 끝까지 밀면 누구도 감당 못 할 경우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장비가 멈춘 회사에 약속대로 배상을 시키면, 잘못한 일이 없는 쪽이 문을 닫게 됩니다. 반대로 사정을 봐주기 시작하면 어디까지가 사정인지를 매번 다투게 됩니다. 그래서 예외를 미리 적어 두고 목록 안에 드는 경우에만 책임을 면하는 방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불가항력 조항이 그 목록이 사는 자리입니다.

페이지덱도 계약을 맺고 두 해가 지나서야 이 조항을 꺼내 봤습니다. 빌려 쓰던 외부 서버 업체의 한 지역 설비가 멈춰 서비스가 일곱 시간 동안 열리지 않았고, 기업 고객 두 곳이 계약서에 적힌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규원은 우리 잘못이 아니니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약서 목록에 적힌 것은 천재지변·전쟁·정부 명령 셋뿐이었습니다. 상대 법무 검토자의 답은 그 업체를 고른 것이 페이지덱의 결정이라는 한 줄이었습니다.

작동 방식

계약서에 사유를 미리 나열해 두고, 그중 하나가 실제로 일어나 약속을 못 지키게 만들었음을 주장하는 쪽이 증명하면, 그 기간 동안 해당 의무가 멈춥니다. 저절로 작동하는 장치가 아니라 요건을 갖춰 꺼내 드는 방패입니다.

요건은 넷으로 나뉩니다.

  1. 목록에 있어야 합니다. 지진·태풍·전쟁·감염병 유행·정부의 영업 중지 명령 같은 사유를 이름으로 적어 둡니다. 목록 끝에 "그 밖에 당사자의 합리적 통제를 벗어난 사유" 라는 한 줄을 붙이느냐가 가장 자주 다투는 지점입니다. 이 줄이 있으면 적어 두지 못한 일까지 들어오고, 없으면 적힌 것만 인정됩니다.
  2. 그 사건이 이행을 막았어야 합니다. 비용이 올라간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환율이 뛰어 수입 장비값이 30퍼센트 올랐다면 손해지만 이행은 여전히 가능하므로 여기 들지 않습니다.
  3. 상대에게 알려야 합니다. 사유가 생긴 날로부터 며칠 안에 알리라는 기한이 함께 적히고, 보통 5일이나 10영업일입니다. 통지를 놓치면 사유가 분명해도 조항을 못 쓴다고 적어 두는 일이 흔합니다.
  4. 효과는 면제가 아니라 정지입니다. 사유가 이어지는 동안 의무와 위약금이 멈췄다가 사유가 끝나면 다시 살아납니다. 정지가 30일이나 60일을 넘으면 어느 쪽이든 계약을 끝낼 수 있게 해 두는 것이 보통입니다.

돈을 내는 의무는 대개 목록 밖에 빼 둡니다. 지진이 났다고 이미 쓴 달의 이용료를 안 내도 되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한 줄이 빠지면 파는 쪽은 정상으로 제공한 기간의 대금도 못 받을 수 있습니다.

쓰이는 곳

가장 많이 오가는 자리는 기업 고객과의 계약서 검토입니다. 특히 SLA, 곧 서비스를 어느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숫자로 약속한 문서와 짝으로 읽습니다. 한쪽에 월 99.9퍼센트라는 값이 적혀 있고 다른 쪽에 그 값을 못 지켜도 되는 경우가 적혀 있으니, 둘을 따로 보면 무엇을 약속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외부 서비스에 기대어 만든 제품에서는 경계가 더 자주 문제가 됩니다. 남의 서버와 남의 결제 모듈 위에 얹은 제품은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멈출 수 있는데, 그 업체를 고른 것은 우리 결정입니다. 외부 업체 장애를 불가항력으로 인정받으려면 목록에 적혀 있어야 하고, 사는 쪽은 대개 그 문장을 빼려 합니다. 대신 대체 업체를 확보할 의무를 계약에 넣자는 절충이 나옵니다.

감염병 유행을 겪은 뒤로는 목록의 생김새도 달라졌습니다. 천재지변 한 단어로 뭉뚱그리던 자리에 감염병·검역 조치·영업 제한 명령이 각각 이름을 갖고 들어갔습니다. 해외 고객과의 계약에서는 준거법, 곧 이 문서를 어느 나라 법으로 읽을지 정한 조항도 함께 봅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기준이 되는 법에 따라 인정 범위가 달라집니다.

실무 용례

"이번 장애가 불가항력에 해당하나요? 목록에 클라우드 사업자 장애가 있는지부터 봐 주세요."

우리 판단이 아니라 계약서 목록이 기준이라는 순서를 짚는 말입니다.

"불가항력 통지 기한이 5영업일인데 오늘이 나흘째입니다. 오늘 안에 보내죠."

사유가 인정되더라도 통지를 놓치면 조항을 못 쓰니 먼저 처리하자는 뜻입니다.

"이 조항에서 대금 지급 의무는 빼 주세요."

서비스를 못 준 기간의 책임은 면하더라도, 정상으로 제공한 기간의 돈은 받겠다는 요구입니다.

페이지덱은 그 일을 겪은 뒤 표준 계약서를 손봤습니다. 규원이 법무 자문을 받아 목록에 감염병과 정부 명령, 대규모 통신망 장애를 넣고, 통지 기한을 5영업일로 적고, 대금 지급 의무는 조항 밖으로 뺐습니다. 외부 서버 업체 장애는 목록에 넣는 대신 책임 제한, 곧 배상 금액의 천장을 정한 조항에서 다루기로 했습니다. 인정받기 어려운 항목을 밀어 넣는 것보다 상한을 두는 쪽이 협상에서 덜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 결정은 세일즈 일정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수아가 기업 고객과 계약을 진행할 때 상대 법무 검토가 가장 오래 걸리는 조항이 이 셋이라, 표준 문안을 준비해 두면 검토가 2주쯤 줄어듭니다.

흔한 오해

예상하지 못한 일이면 모두 불가항력이라고 보는 오해가 가장 흔합니다. 이름 자체가 어쩔 수 없는 힘이라는 뜻이라 그렇게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준은 놀랐는지가 아니라 계약서 목록에 있는지와 통제를 벗어났는지입니다. 핵심 개발자의 갑작스러운 퇴사는 예상 밖이지만 인력 관리는 회사의 영역이라 들지 않고, 원자재값 급등도 손해일 뿐 이행을 막지는 않습니다. 이 오해를 안고 있으면 장애가 났을 때 통지 기한을 흘려보내, 인정될 수 있던 사유까지 함께 잃습니다.

불가항력이 인정되면 계약이 끝난다고 보는 오해도 자주 봅니다. 책임을 면한다는 말이 관계가 정리된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시계가 잠시 멈출 뿐이고, 사유가 사라지면 남은 의무가 그대로 이어집니다. 계약을 끝내려면 정지가 얼마나 이어질 때 누가 끝낼 수 있는지를 해지 조항에서 따로 정해야 합니다. 이 연결을 빼 두면 사유가 몇 달째 이어지는데도 계약이 살아 있어, 양쪽 다 아무것도 못 하는 채로 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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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업데이트 2026-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