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책 조항

Indemnification

개념

우리 탓에 고객이 바깥의 제3자에게 배상을 물게 됐을 때 그 비용을 우리가 대신 지겠다고 적어 두는 계약 조항입니다.

등장 배경

소프트웨어를 사는 쪽에는 오래전부터 피할 수 없는 불안이 있었습니다. 남이 만든 프로그램을 들여와 쓰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만든 쪽만 안다는 점입니다. 개발사가 다른 회사의 코드나 글꼴을 허락 없이 가져다 썼다면 그 사실을 아는 쪽은 개발사뿐이고, 권리자에게 편지를 받는 쪽은 그 프로그램을 쓰던 고객사입니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이런 모양입니다. 어느 날 고객사 앞으로 글꼴 회사의 내용증명이 도착합니다. 귀사 홈페이지에 저희 글꼴이 무단으로 쓰이고 있으니 사용료를 내라는 내용입니다. 그 글꼴은 홈페이지를 만들어 준 외주사가 넣은 것인데 청구서는 고객사 앞으로 옵니다. 권리자에게는 누가 넣었는지가 아니라 누가 쓰고 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고객사가 개발사에 "그쪽이 넣었으니 그쪽이 해결하세요" 라고 말해도 계약서에 그런 문장이 없으면 근거가 없습니다. 개발사는 우리 계약은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는 것까지였다고 답할 수 있고, 고객사는 변호사를 따로 선임해 자기 돈으로 다투게 됩니다. 만든 쪽의 잘못인데 비용은 산 쪽이 치릅니다.

면책 조항은 이 어긋남을 계약서 안으로 끌고 들어온 장치입니다. 문제를 만든 쪽이 그 대가도 치르도록 미리 적어 두는 것이고, 그래서 사는 쪽이 계약 전에 먼저 확인하는 문장이 됐습니다.

작동 방식

세 당사자가 등장한다는 점이 이 조항의 뼈대입니다. 우리와 고객이 계약을 맺어 두고, 관계 밖의 제3자가 고객에게 청구를 겁니다. 다른 조항들이 대부분 우리와 고객 사이의 일을 다루는 것과 달리 면책 조항은 고객과 바깥 사이의 일을 다룹니다.

실제로 발동되면 순서는 네 단계로 흘러갑니다.

  1. 고객이 제3자에게 청구를 받으면 정해진 기간 안에 우리에게 알립니다. 보통 며칠 안에 서면으로 알리게 되어 있고, 통지가 늦으면 우리가 면책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습니다. 늦게 알수록 대응할 폭이 줄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방어를 맡습니다. 변호사를 고르고 어떻게 다툴지 정하는 권한이 우리에게 옵니다. 돈을 내는 쪽이 방식을 정한다는 뜻이고, 고객이 비싼 로펌을 쓰고 청구서만 넘기는 일을 막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3. 비용을 우리가 냅니다. 변호사 비용, 법원에 내는 돈, 최종 배상금이 다 들어갑니다. 재판에서 이겨 배상금이 0원이어도 변호사 비용은 이미 나간 뒤입니다.
  4. 합의는 양쪽 동의로 합니다. 돈만 내고 끝낼 조건이면 우리가 정하고, 고객이 무언가를 계속 못 하게 되는 조건이면 고객 동의를 받습니다.

무엇에 대해 면책하는지도 문장 안에 정해 둡니다. 지식재산권 침해가 가장 흔한 대상으로, 우리가 판 제품이 남의 특허나 저작권을 침해해 고객이 청구를 받는 경우입니다. 여기에 개인정보 유출이나 직원의 위법 행위를 더하기도 하는데, 넓게 적을수록 우리가 지는 위험이 커져 협상에서 줄다리기가 일어납니다.

쓰이는 곳

기업 고객과 맺는 계약서에서 거의 빠지지 않습니다. 거래 전반의 조건을 한 벌로 묶어 둔 기본 계약서 안에 면책 조항이 들어가고, 건별로 붙는 작업 명세서에는 이번에 무엇을 만들어 주는지만 적습니다. 면책은 건이 바뀌어도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엔터프라이즈 영업에서는 이 조항 때문에 계약이 몇 주씩 늦어지기도 합니다. 상대가 클수록 법무 검토가 촘촘해서, 지식재산권만 다루던 문장에 보안 사고와 개인정보 유출까지 넣어 달라는 요구가 들어옵니다. 파는 쪽은 받아들일 선을 미리 정해 두고 협상에 들어갑니다.

방향이 반대인 자리도 있습니다. 이용약관에는 사용자가 우리를 면책한다는 문장이 보통 들어갑니다. 사용자가 남의 저작물을 우리 서비스에 올려 권리자가 우리에게 청구를 걸면 그 비용을 올린 사람이 진다는 내용입니다.

조항을 쓰는 일보다 지킬 수 있게 만드는 일이 더 큽니다. 제품 안에 남의 코드가 어떤 조건으로 들어와 있는지 모르면 면책 약속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됩니다. 오픈소스 라이선스는 공개된 소프트웨어를 쓸 때 지켜야 할 조건인데, 그 코드를 쓴 제품 전체를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코드가 섞여 있으면 고객이 받는 청구를 우리가 떠안습니다.

실무 용례

"면책 범위에 보안 사고까지 넣어 달라는데 이건 못 받습니다."

지금 지는 위험보다 훨씬 커지므로 협상에서 막겠다는 뜻입니다.

"이 조항은 책임 제한 상한 밖에 있어요. 한도 없이 물어야 합니다."

다른 배상은 상한이 있지만 면책은 그 상한을 안 받는다는 말입니다.

"저희가 방어권을 가져가는 조건이면 동의하겠습니다."

비용을 내는 대신 어떻게 다툴지는 우리가 정하겠다는 조건입니다.

페이지덱이 처음 큰 기업 고객과 계약할 때 이 조항이 가장 오래 걸렸습니다. 상대 법무팀이 보낸 계약서에는 페이지덱이 지식재산권과 개인정보와 보안 사고를 모두 면책하고 그 셋은 배상 상한도 적용받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연 6천만 원짜리 계약에 붙은 조건이었습니다.

규원과 수아가 협상해 개인정보와 보안 사고는 연 계약 금액의 세 배를 상한으로 두고 지식재산권만 상한 없이 남겼습니다. 대신 태오가 제품에 들어간 외부 코드의 라이선스를 전부 목록으로 정리했습니다. 상한 없는 약속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 목록에서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흔한 오해

이름 때문에 우리가 책임을 면하는 조항이라고 읽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면책이라는 두 글자에 책임을 면한다는 뜻이 들어 있으니 당연한 오독입니다. 그러나 이 조항이 면하게 해 주는 것은 상대의 책임이고 그 책임을 대신 지는 쪽은 우리입니다. 방향을 거꾸로 읽으면 계약서에서 가장 무거운 문장을 가장 가벼운 문장으로 착각하고, 검토 없이 넘긴 한 줄 때문에 상한 없는 비용을 떠안습니다.

양쪽에 똑같이 걸리는 조항이라는 오해도 흔합니다. 계약은 대등한 약속이니 면책도 서로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는 대개 한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파는 쪽이 제품에 대해 지는 면책은 넓고, 사는 쪽이 지는 면책은 자기가 올린 자료처럼 좁습니다. 한 방향인지 양 방향인지, 양 방향이라도 범위가 같은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대등해 보이는 문단 안에서 혼자만 큰 위험을 집니다.

자주 헷갈리는 용어

용어무엇을 정하는가면책 조항과의 차이
책임 제한물어 줘야 하는 금액의 천장얼마까지인지를 정합니다. 면책은 누가 무는지를 정하고, 흔히 이 천장의 적용을 받지 않는 예외로 빠집니다
보증 조항제품이 어떤 상태일지에 대한 약속우리와 고객 사이의 약속입니다. 면책은 고객과 제3자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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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업데이트 2026-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