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제한

Limitation of Liability

개념

사고가 났을 때 한쪽이 물어 줘야 하는 배상액의 천장을 계약서에 미리 적어, 한 건의 사고가 회사 전체를 흔들지 못하게 묶어 두는 조항입니다.

등장 배경

이 문장이 없으면 사고 한 번의 값이 얼마까지 불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월 30만 원을 받고 쓰게 해 준 협업 도구가 하루 멈췄는데 그사이 고객사가 주문을 받지 못해 5억을 잃었다면, 받은 돈과 물어 줄 돈 사이에 아무 연결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1년 내내 받아도 360만 원인 거래에서 5억짜리 청구가 나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파는 쪽은 큰 계약을 앞에 두고 오히려 망설였습니다. 페이지덱에서도 첫 기업 고객 계약서를 수아가 들고 왔을 때 규원이 끝까지 읽고 물은 것은 가격이 아니라 이것이었습니다. "이거 한 번 잘못되면 회사가 없어지는 조건 아니에요?" 연 3600만 원을 받는 계약 하나 때문에 회사 전체가 걸린다면, 그 계약은 매출이 아니라 사업 전체를 담보로 잡힌 것입니다.

사는 쪽도 한도가 열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안심하지 못합니다. 상대 회사의 전 재산이 10억이면 50억짜리 손해가 나도 받아 낼 수 있는 돈은 10억까지입니다. 무한한 책임은 종이 위에서만 무한합니다. 그래서 양쪽이 받아들일 숫자를 미리 적고 그 값을 전제로 가격을 정하는 쪽으로 정리됐습니다.

작동 방식

천장은 금액 하나로만 정해지지 않고 세 개의 장치가 겹쳐 만들어집니다.

  1. 상한 금액. 배상액의 최대치를 정합니다. 사고가 나기 직전 12개월 동안 고객이 실제로 낸 이용료까지로 묶는 방식이 가장 흔합니다. 월 100만 원을 내던 고객이면 천장은 1200만 원입니다. 계약 총액이 아니라 이미 받은 돈을 기준으로 잡는 이유는, 그래야 거래 규모와 위험의 자릿수가 서로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손해의 종류. 어떤 손해까지 세는지를 나눕니다. 서비스가 멈춰 고객이 복구에 쓴 비용은 직접 손해이고, 그 시간에 팔지 못한 매출과 떨어진 평판은 간접 손해입니다. 간접 손해는 통째로 빼는 것이 보통입니다. 금액을 가늠할 방법이 없어서, 여기를 열어 두면 상한 금액을 아무리 낮게 잡아도 다툼의 크기가 줄지 않습니다.
  3. 예외 목록. 천장 밖에 두는 항목을 적습니다. 일부러 저지른 잘못과 중대한 과실, 비밀유지 약속을 어긴 경우, 개인정보를 유출한 경우, 면책 조항이 다루는 제3자 청구가 단골로 들어갑니다. 이 목록에 오른 사고에는 천장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세 장치를 다 읽어야 실제 한도가 나옵니다. 상한이 1200만 원이라도 예외 목록에 개인정보 유출이 올라 있으면, 유출 사고에서 이 조항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조항은 보통 양쪽에 똑같이 걸립니다. 우리가 물어 줄 금액에 천장이 있으면 고객이 이용료를 밀렸을 때 우리가 받을 금액에도 같은 천장이 생깁니다. 그래서 상한을 무작정 낮추는 것이 늘 유리하지는 않습니다.

협상에서 움직이는 값은 대개 배수와 기간 둘입니다. 사는 쪽은 12개월치를 24개월치로, 1배를 2배나 3배로 올리자고 합니다. 보증 조항에 적힌 약속이 무거울수록 이 배수도 같이 올라갑니다. 한 달에 99.9퍼센트를 살려 두겠다고 적어 놓고 배상 천장만 낮게 잡아 두면 약속의 무게와 값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쓰이는 곳

기업 고객과 맺는 기본 계약서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들어갑니다. 기본 계약서는 개별 거래마다 다시 쓰지 않도록 거래 전반의 조건을 한 번 정해 두는 문서인데, 상대 법무 검토자가 가장 먼저 빨간 줄을 긋는 세 줄 안에 이 조항이 있습니다. 엔터프라이즈 영업에서 계약이 몇 주씩 늘어지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나옵니다.

개인이 혼자 가입해 결제하는 제품에서는 이용약관에 같은 내용이 들어갑니다. 협상 상대가 없어 문장이 한 번 정해지면 그대로 갑니다.

숫자로 먼저 부딪히는 자리는 SLA입니다. SLA는 가동률 같은 서비스 수준을 계약으로 약속한 것인데, 약속이 깨졌을 때 돈으로 물어 주는 대신 다음 달 이용료를 깎아 주는 식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깎아 주는 금액이 사실상 첫 번째 천장이고,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손해가 이 조항이 정한 두 번째 천장에 걸립니다.

실무 용례

"책임 제한이 12개월 이용료로 묶여 있는데 상대가 2배를 요구했어요."

계약 규모가 6천만 원이면 최악의 경우 물어 줄 금액이 1억 2천만 원까지 올라간다는 뜻이고, 받아들일지 결정해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개인정보 건은 캡 밖으로 빼 달라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유출 사고에는 천장을 적용하지 말라는 요구입니다. 사고 한 건의 최대 손실이 열린다는 뜻이라 대표 결재가 필요한 사안입니다.

"이 계약, 최악으로 가면 우리가 얼마까지 무는 거예요?"

조항을 읽은 사람에게 숫자 하나로 답을 달라는 질문입니다.

페이지덱에서 이 조항이 등장하는 자리는 대체로 같습니다. 수아가 기업 고객과의 계약서 초안을 받아 오면 상대 쪽이 고쳐 놓은 부분을 표시해 규원에게 넘깁니다. 규원이 보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천장이 얼마인지, 무엇이 천장 밖으로 나가 있는지, 그 조건이 우리 쪽에도 똑같이 걸리는지입니다.

세 값이 감당할 범위 안에 있으면 통과시키고, 벗어나면 가격을 다시 계산합니다. 위험을 더 지는 계약은 더 비싸야 하기 때문입니다.

흔한 오해

가장 잦은 오해는 여기 적힌 금액이 곧 최대 손실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숫자가 분명하게 적혀 있으니 그렇게 읽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조항에는 늘 예외 목록이 따라붙고, 실제로 회사를 흔드는 사고는 대부분 그 목록에 올라 있는 종류입니다. 개인정보 유출이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천장은 배상액에만 걸립니다. 조사 대응 인건비와 변호사 비용은 천장과 무관하게 나갑니다. 상한이 1200만 원이라는 이유로 유출 사고를 가볍게 다루면, 그 판단 자체가 예외 목록이 적용되는 상황을 만듭니다.

두 번째 오해는 상한이 낮을수록 좋다고 보는 것입니다. 파는 쪽 입장에서 위험이 줄어드니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계약에서 이 조항은 양쪽에 같이 걸리고, 우리도 다른 회사의 도구를 쓰는 고객이라는 사실은 잊히기 쉽습니다. 더 큰 문제는 협상장에서 생깁니다. 천장을 지나치게 낮게 부르면 상대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연 2억짜리 계약에서 배상 한도를 500만 원으로 부르면 대개 검토가 거기서 멈춥니다.

자주 헷갈리는 용어

용어무엇을 정하는가책임 제한과의 차이
면책 조항고객이 제3자에게 청구를 받았을 때 그 비용을 누가 지는지누가 낼지를 정하고, 이 조항은 얼마까지 낼지를 정합니다. 둘은 한 계약서에 같이 있고 순서대로 읽습니다. 면책으로 우리가 부담한다고 정해진 금액이 천장 안에 들어오는지, 아니면 예외 목록에 올라 천장 밖인지가 실제 손실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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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업데이트 2026-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