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거법

Governing Law

개념

계약을 두고 다툼이 생겼을 때 그 계약서를 어느 나라 법으로 읽고 판단할지 미리 정해 두는 조항입니다.

등장 배경

국내 회사끼리만 거래하던 시절에는 아무도 이 줄을 읽지 않았습니다. 양쪽 다 한국에 있고 한국 법 아래 있으니 굳이 적을 이유가 없었고, 적혀 있어도 계약서 맨 뒤 형식적인 문장 정도로 넘어갔습니다.

해외 고객이 생기면서 이 한 줄이 갑자기 무거워졌습니다. 계약서는 모든 상황을 다 적어 두지 못합니다. 적히지 않은 빈칸은 법이 메우는데, 그 법이 나라마다 다릅니다. 손해를 얼마까지 물어야 하는지, 몇 년이 지나면 더는 청구하지 못하는지, 한쪽이 약속을 어겼을 때 계약을 바로 끝낼 수 있는지가 기준이 되는 법에 따라 갈립니다. 같은 문장을 놓고도 서울에서 읽을 때와 캘리포니아에서 읽을 때 결론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페이지덱에서 이 문제가 처음 드러난 건 싱가포르 고객사와의 계약이었습니다. 상대가 보내온 계약서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을 따른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수아는 늘 보던 마지막 조항이라 그냥 넘겼고, 규원이 "이게 무슨 차이가 나나요" 하고 물었을 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회사에 없었습니다. 외부 변호사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분쟁이 나면 한국 법으로는 막혔을 청구가 저 법으로는 열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작동 방식

계약서 뒤쪽에 "본 계약은 대한민국 법에 따라 해석된다" 같은 한 문장을 넣어 두면, 나중에 다툼을 판단하는 사람이 그 법을 자로 삼아 계약서를 읽습니다. 조항이 하는 일은 그게 전부입니다. 누가 옳은지를 정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재는 자를 정합니다.

이 자가 실제로 결과를 바꾸는 지점은 세 곳입니다.

  1. 계약서에 안 적힌 빈칸을 메웁니다. 납품이 늦었을 때 얼마를 물어야 하는지 계약서에 없으면 준거법의 기본 규칙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2. 적힌 문장의 효력을 판단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책임 제한 조항이 정한 배상 상한을 법원이 그대로 인정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지나치게 낮다고 보아 무효로 만듭니다. 같은 문장이 한쪽에서는 살고 한쪽에서는 죽습니다.
  3. 언제까지 청구할 수 있는지를 정합니다. 계약 위반을 몇 년 안에 문제 삼아야 하는지가 법마다 다릅니다. 3년이 지나 이미 닫힌 문이 다른 법에서는 아직 열려 있기도 합니다.

같이 붙어 다니는 한 줄이 관할 법원입니다. 준거법이 어떤 법으로 읽을지를 정한다면, 관할 법원은 어느 나라 법원에서 다툴지를 정합니다. 둘은 따로 정할 수 있어서 한국 법을 적용하되 재판은 싱가포르에서 하는 식의 조합도 가능하지만, 실무에서는 대개 맞춰 둡니다. 어긋나 있으면 싱가포르 법원이 한국 법 전문가를 불러 의견을 듣는 절차가 붙고, 그 비용만으로 웬만한 분쟁 금액을 넘어섭니다.

쓰이는 곳

기업 고객과 맺는 기본 계약서에는 거의 예외 없이 들어갑니다. 개별 건마다 다시 정하지 않고 관계 전체에 한 번 걸어 두기 때문에, 여기 적힌 법이 그 고객과 주고받는 모든 문서에 따라붙습니다.

이용약관에도 들어갑니다. 협상할 상대가 없는 문서라 파는 쪽이 자기에게 익숙한 법을 적어 두는 것이 보통입니다. 다만 개인 소비자를 상대할 때는 그 나라 소비자 보호법이 약관보다 우선하는 경우가 많아서, 적어 둔 대로 다 되지는 않습니다.

해외에 법인을 세우면 같은 제품을 두고 계약서가 둘로 갈립니다. 미국 법인이 미국 고객과 맺는 계약은 델라웨어주 법으로, 한국 본사가 국내 고객과 맺는 계약은 한국 법으로 가는 식입니다. 문안이 둘이 되면 관리 부담도 둘이 되니, 어느 쪽 법인이 어느 고객을 받을지를 계약 단계가 아니라 법인을 세우는 단계에서 정해 둡니다.

협상에서는 대개 힘의 문제로 풀립니다. 덩치가 큰 쪽이 자기 나라 법을 밀어붙이고, 작은 쪽이 받아들입니다. 스타트업이 대기업 고객을 받을 때 이 줄만 양보하지 못해 계약이 늦어지는 일은 드뭅니다. 양쪽 다 양보하기 어려우면 싱가포르나 영국처럼 어느 쪽도 홈이 아닌 제3국 법으로 절충하기도 합니다.

실무 용례

"이 계약 준거법이 뉴욕주 법으로 되어 있는데, 면책 조항 범위를 다시 봐야 합니다."

기준이 되는 법이 바뀌었으니 손해를 대신 물어 주기로 한 범위가 생각보다 넓어졌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준거법은 양보하더라도 관할은 서울로 가져옵시다."

어느 법으로 읽을지보다 어디까지 날아가서 다퉈야 하는지가 비용에서 더 크다는 판단입니다.

"이 건은 국내 고객이니까 준거법 조항은 기본 문안 그대로 갑니다."

양쪽 다 한국에 있어 다툴 여지가 없으니 검토 시간을 쓰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페이지덱에서 이 조항이 올라오는 자리는 정해져 있습니다. 수아가 기업 고객 계약서를 받아 규원에게 넘길 때입니다. 규원은 금액이 걸린 조항들을 먼저 보고 맨 뒤 준거법과 관할을 확인합니다. 국내면 그대로 넘기고, 해외면 외부 변호사에게 검토를 맡깁니다. 검토 의견은 대개 두 줄로 돌아옵니다. 이 법에서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동하는 조항이 무엇인지, 그 조항을 어떻게 고쳐 달라고 요청할지입니다. 계약 한 건에 몇백만 원이 드는 절차라서 모든 건에 붙이지는 않고, 계약 금액이 일정 선을 넘거나 상대 법이 낯선 나라일 때만 돌립니다.

흔한 오해

준거법을 한국 법으로 받아 두면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익숙한 법이니 유리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관할 법원이 상대 나라로 적혀 있으면 한국 법으로 유리한 주장을 펴기 위해 그 나라까지 변호사를 데리고 가야 합니다. 실제로는 그 비용이 아까워 청구를 포기하게 되고, 조항은 종이에만 남습니다. 두 줄을 함께 보지 않으면 한쪽을 지킨 대가로 다른 쪽을 내준 줄 모릅니다.

계약서 맨 뒤에 붙는 형식적인 문장이라 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것도 흔합니다. 금액이나 납기처럼 눈에 띄는 조건이 아니어서 검토가 뒤로 밀립니다. 하지만 이 줄은 나머지 조항 전부의 해석 기준이라, 여기가 바뀌면 이미 합의한 보증 조항과 분쟁 해결 절차의 의미까지 같이 흔들립니다. 서명한 다음에 발견하면 조항 하나를 고치는 일이 아니라 계약서 전체를 다시 읽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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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업데이트 2026-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