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실무

Contracting Practice

개념

계약서와 약관에 어떤 조항을 넣고 상대가 보낸 조항을 어디까지 고칠지 다루는 일입니다.

등장 배경

작은 회사에서 계약서는 오랫동안 읽는 문서가 아니라 서명하는 문서였습니다. 서른 장짜리 파일을 받으면 가격과 기간만 확인하고 나머지는 넘겼습니다. 안 읽은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어디를 봐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조항마다 이름이 붙어 있는데 그 이름이 무엇을 막으려고 있는 문장인지 모르면 서른 장이 통째로 한 덩어리로 보입니다. 게다가 이 문서는 잘 굴러가는 동안에는 한 번도 펼쳐지지 않습니다. 사이가 틀어진 날에만 읽히니, 읽지 않은 대가는 계약할 때가 아니라 몇 달 뒤에 청구됩니다.

페이지덱이 첫 기업 고객과 계약하던 주가 그랬습니다. 수아가 받아 온 계약서를 규원에게 넘기며 상대 쪽에서 표준 양식이라고 했으니 그냥 서명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규원도 가격과 기간만 보고 서명했습니다. 넉 달 뒤 배포 사고로 그 고객사의 문서가 여섯 시간 동안 열리지 않았습니다. 상대 구매 담당자가 인용한 것은 아무도 읽지 않았던 12조였고, 그 조에는 배상 금액의 상한이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연 1200만 원을 받던 고객 한 곳에서 그 몇 배를 물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 그제야 보였습니다.

읽지 않아서 생기는 손해가 사고가 났을 때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별도로 알리지 않으면 계약이 저절로 한 해 더 이어진다고 적어 둔 문장을 그냥 넘기면, 쓰지 않기로 한 도구의 값을 일 년 더 내고 나서야 그런 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계약을 끝내겠다고 말할 수 있는 기간이 만료 60일 전까지로 정해져 있는데 그 사실을 만료 2주 전에 알게 되는 식입니다.

흩어져 있던 조항들을 한 이름으로 묶어 부르기 시작한 것이 이 말입니다. 묶고 나면 계약서가 덩어리가 아니라 목차로 보입니다. 어떤 조항이 있어야 하는지 알면 상대가 보낸 문서에서 무엇이 빠졌는지도 보이고, 빠진 것을 채워 달라고 말할 근거도 생깁니다. 법이 정한 하한선은 상대가 괜찮다고 해도 낮출 수 없지만, 그 위에 얹는 약속은 양쪽이 합의해 고칠 수 있는 문장입니다. 계약 실무가 다루는 것은 이 고칠 수 있는 영역입니다.

분야 구성

이 이름 아래 묶인 용어는 두 갈래입니다. 약속을 담는 그릇이 한쪽(문서)이고, 그 그릇 안에 들어가는 개별 문장이 다른 쪽(조항)입니다.

문서는 누구와 무엇을 두고 맺는 관계인지 정하는 갈래입니다. 두 가지가 있고, 상대를 한 명씩 마주하느냐 전체를 한꺼번에 상대하느냐로 갈립니다.

  1. 이용약관 — 서비스를 쓰는 조건을 한 벌로 정해 두고 쓰는 사람 전부에게 같은 문장을 거는 문서입니다. 협상하지 않는다는 점이 개별 계약서와 다릅니다. 가입 버튼을 누르는 순간 동의가 성립하고, 대신 내용을 바꾸려면 쓰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미리 알려야 합니다. 값을 올리거나 무료 플랜의 저장 용량을 줄이는 결정이 제품 결정이자 약관 개정 작업이 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2. 작업 명세서 — 이번 건에서 무엇을 어디까지 해 주는지 적은 문서입니다. 관계의 규칙을 정하는 문서가 따로 있고 그 아래에 건별로 붙습니다. 여기 한 줄이 빠지면 공수가 통째로 흔들립니다. 기존 시스템에 쌓인 문서 8만 건을 옮겨 주는 일이 범위에 있는지 없는지가 적혀 있지 않으면, 고객은 당연히 해 주는 줄 알고 개발팀은 예정에 없던 2주를 쓰게 됩니다.

조항은 그 관계가 틀어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정해 두는 갈래입니다. 일곱 가지가 있는데, 무엇을 정하느냐로 묶으면 셋입니다. 돈이 어디로 가는지, 관계를 어떻게 끝내는지, 다툼이 생기면 어디로 가는지입니다.

  1. 보증 조항 — 제품이나 서비스가 어떤 상태일지 약속하는 문장입니다. 한 달에 몇 퍼센트의 시간 동안 서비스가 살아 있을지, 심각한 장애에 몇 시간 안에 답할지 같은 숫자가 여기 들어갑니다. 나머지 조항은 대부분 이 약속이 깨졌을 때를 다루므로, 여기 적힌 숫자가 실제로 지킬 수 있는 값인지가 계약 전체의 출발점입니다.
  2. 면책 조항 — 우리 탓에 고객이 제3자에게 손해배상을 물게 됐을 때 그 비용을 우리가 대신 진다는 문장입니다. 우리가 쓴 남의 코드나 글꼴 때문에 고객사가 권리자에게 청구를 받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고객과 우리 사이가 아니라 고객과 바깥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다룬다는 점이 다른 조항과 구분됩니다.
  3. 책임 제한 — 물어 줘야 하는 금액의 천장을 정하는 문장입니다. 최근 12개월 동안 받은 금액까지로 묶는 방식이 흔합니다. 이 천장이 없으면 연 1200만 원짜리 고객 한 곳에서 생긴 사고가 회사 전체를 흔들 수 있습니다. 파는 쪽이 가장 먼저 확인하는 조항이고, 반대로 사는 쪽은 이 천장을 올리려고 협상합니다.
  4. 해지 조항 — 어떤 경우에 계약을 끝낼 수 있는지 정합니다. 특별한 잘못이 없어도 몇 달 전에 알리면 끝낼 수 있는지, 상대가 약속을 어겼을 때 며칠의 시정 기간을 주고 나서 끝낼 수 있는지가 나뉘어 적힙니다. 끝낸 다음에 고객이 쌓아 둔 데이터를 어떤 형식으로 언제까지 돌려주는지도 여기 붙는 것이 보통입니다.
  5. 불가항력 — 지진이나 전쟁처럼 어느 쪽 잘못도 아닌 사유가 생겼을 때 약속을 못 지킨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문장입니다. 목록을 어디까지 적느냐가 실무에서 갈립니다. 우리가 빌려 쓰는 외부 서버가 멈춘 일은 대개 여기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 서버를 고른 것이 우리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6. 준거법 — 이 문서를 어느 나라 법으로 읽을지 정합니다. 같은 문장도 기준이 되는 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에, 해외 고객과의 계약에서 조용히 넘어가면 안 되는 한 줄입니다. 함께 적히는 관할 법원이 어디냐에 따라 다툼이 생겼을 때 드는 비용의 자릿수가 달라집니다.
  7. 분쟁 해결 — 다툼이 생겼을 때 법원으로 갈지 중재로 갈지, 그전에 몇 주 동안 협의를 먼저 해 볼지 같은 절차를 정합니다. 앞의 여섯 조항이 무엇이 맞는지를 정한다면 이 조항은 맞고 틀림을 누가 판단할지를 정합니다.

두 갈래는 그릇과 내용의 관계입니다. 문서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정하고, 조항이 그 관계에 조건을 답니다. 읽는 순서를 정해 두면 낯선 계약서도 훨씬 빨리 넘어갑니다. 돈이 걸린 세 조항을 먼저 보고, 끝내는 방법을 보고, 다툼이 생겼을 때 갈 곳을 마지막에 확인하는 식입니다. 일곱 조항을 매번 다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문서를 쓰느냐가 무게를 옮깁니다. 개인이 혼자 가입해 카드로 결제하는 제품은 약관 한 벌이 거의 전부를 감당하고, 협상할 상대가 없으니 조항을 다투는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다 기업 고객이 한 곳 생기면 그날부터 일곱 조항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상대 쪽 구매 부서와 법무 검토자가 우리 약관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들 계약서를 보내오기 때문입니다.

실무 용례

"이 계약서에 책임 제한이 안 들어가 있어요. 상한 없이 그대로 서명하면 장애 한 번에 이 고객 연 계약금의 몇 배가 나갈 수 있습니다."

조항 하나가 빠졌다는 지적이자, 그 빈칸이 얼마짜리인지 금액으로 환산해 보여 주는 말입니다.

"표준 양식이라고는 하는데 저쪽도 수정본을 수십 번 받아 봤을 거예요. 세 군데만 고쳐서 보내죠."

상대가 보낸 문서는 확정본이 아니라 첫 제안이라는 뜻입니다.

"가동률 숫자는 법무가 아니라 개발팀이 답해야 해요. 지난 분기에 실제로 몇이었는지 보고 그 아래로 적읍시다."

계약서의 약속을 실제로 지킬 사람에게 먼저 확인하자는 요청입니다.

페이지덱이 두 번째 기업 고객과 계약하던 때는 순서가 달랐습니다. 수아가 계약서를 받자마자 규원에게 넘겼고, 규원은 배상 상한과 해지 통보 기간과 준거법 세 곳을 표시했습니다. 상한은 아예 없었고, 해지는 상대만 언제든 할 수 있게 적혀 있었습니다. 규원이 태오에게 물은 것은 조항이 아니라 숫자였습니다. 상대가 요구한 월 가동률 99.9퍼센트를 지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 태오가 지난 두 분기 기록을 뽑아 보니 99.2와 99.6이었습니다.

그래서 페이지덱이 보낸 수정본에는 가동률이 99.5로 내려가 있었고, 배상 상한은 최근 12개월 지급액으로 새로 들어갔습니다. 상대 구매 담당자는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이는 대신 장애가 났을 때 알리는 시간을 네 시간에서 두 시간으로 줄여 달라고 했습니다. 서명까지 2주가 더 걸렸지만, 그 2주 동안 정해진 것들은 이후 3년 동안 두 회사가 다툴 일을 미리 줄여 놓았습니다. 지현은 같은 주에 무료 플랜 이용약관도 손봤습니다. 저장 용량을 줄이기로 한 결정 때문에 쓰고 있는 사람 전부에게 30일 전 고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흔한 오해

표준 계약서는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이름부터 표준이고, 수정할 수 없는 형식으로 오고, 서명란만 비어 있으니 그렇게 읽힙니다. 하지만 상대 법무 담당자는 수정본을 받는 일을 매주 합니다. 표준이라는 말은 우리 쪽에서 매번 처음부터 쓰지 않으려고 만들어 둔 출발점이라는 뜻이지, 고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번도 고쳐 보지 않고 서명하면 그 조건이 그대로 굳습니다. 갱신할 때는 이전 계약서를 복사해 오기 때문에, 첫해에 넘어간 조항은 3년 뒤에도 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계약서는 법무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생각도 흔합니다. 문장이 낯설고 용어가 어려우니 아는 사람에게 맡기는 편이 안전해 보입니다. 그런데 조항에 적히는 내용의 대부분은 다른 팀이 지킬 약속입니다. 가동률과 장애 대응 시간은 개발팀이, 데이터 이전 범위는 고객 지원이, 할인 폭과 해지 조건은 영업이 실제로 감당합니다. 확인 없이 숫자가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는 약속이 문서에 남습니다. 그 약속을 처음 읽는 날은 대개 그것을 못 지킨 날이고, 그때는 조항을 고칠 수 있는 시점이 이미 지나 있습니다. 반대로 서명 전에 한 시간을 들여 각 숫자를 감당할 팀에게 물어보면, 대개 그 자리에서 값이 조정되고 못 지킬 약속은 애초에 문서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자주 헷갈리는 용어

용어무엇을 가리키는가계약 실무와의 차이
업무 협약본 계약을 맺기 전에 함께 해 보자는 의사를 확인해 두는 문서지키라고 강제할 수 있는지가 다릅니다. 이쪽 문서의 조항은 어기면 돈으로 물어야 하지만, 저쪽은 대개 구속력을 두지 않겠다고 문서 안에 적어 둡니다. 그래서 협약을 맺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상대가 실제로 무엇을 해 줄 의무가 생기지 않고, 조건을 정하는 일은 결국 본 계약에서 다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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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용어

마지막 업데이트 2026-09-16